IT 회사는 종종 제품이 아니라 환상을 팝니다.
그럴듯한 이름을 붙이고, 화려한 마케팅 서사를 입히고, 인플루언서를 동원해 융단폭격을 가하죠. 그리고 우리는 잠시 설렙니다. 하지만 거품은 결국 꺼지지요. 시간이 지나면 질문 하나가 남습니다.
이게… 정말 나한테 필요한 기능인가?
SK가 약 1년 전 AI 4라는 이름을 달고 셋톱박스를 출시한 데 이어, 이번에 후속 모델인 AI 5 셋톱박스를 내놓았습니다. 10년 넘게 이 바닥(?)에 있으면서 느낀 냉정한 평가를 공유해 드립니다.
이번에 출시한 AI 5 셋톱박스와 리모컨입니다
이름은 AI, 실체는 아리송한 기능들
이름에 AI가 들어간 이유 : 각종 AI 기능들을 욱여넣었기 때문입니다. AI 화질 최적화, AI 사운드, Voice ID, AI 홈.. 이름만 보면 미래에 도착한 듯한데, 하나씩 뜯어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집니다.
AI 화질 최적화
저화질 영상을 업스케일링하는 기능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최근 몇 년간 출시된 대기업 TV들은 이미 자체 AI 엔진으로 이 일을 완벽하게 수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셋톱박스가 굳이 안 해도 될 일을 이름만 바꿔 포장한 셈이죠^^;
요새 대기업 TV들은 자체 AI엔진이 모두 탑재되고 성능도 압도적으로 높습니다
AI 사운드
음성을 또렷하게 하거나 음량을 평준화 해주는 기능입니다만, 이건 이미 LG유플러스에서 일찍이 채택했고, 그쪽 임대료는 4,400원입니다. AI 5는 이보다 월 3,300원이나 더 비쌉니다. (3년으로 환산하면 약 12만원 차이 😦😧)
Voice ID & AI 홈
가족 구성원마다 맞춤 홈 화면을 제공하고, 콘텐츠를 추천해주는 기능입니다. 때때로 상냥하게 생일 인사(?)까지 챙겨주려는 것이 목적인 기능이기도 합니다.
뭐, 취지는 좋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넷플릭스나 유튜브 앱 안에서 더 정교한 추천을 받고 있습니다. 콘텐츠 소비의 관문이 셋톱박스가 아니라 OTT 앱으로 옮겨간 시대에, 이게 과연 월 요금을 더 낼 만큼 절실한 기능인지는 의문입니다.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려는 건 좋은데, 그게 임대료 인상의 이유가 되긴 힘듭니다.
선을 넘은 요금, 복잡해진 계산
가장 큰 문제는 역시 돈입니다. 지금까지 SK의 주력이던 스마트3 셋톱박스 임대료는 월 4,400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신제품은 요금 체계가 아주 묘해졌습니다.
- 임대형 : 월 7,700원 (스마트3 대비 약 1.75배 인상)
- 케어형 : 월 5,500원
"어? 그럼 당연히 2,200원 싼 케어형을 고르면 되는 거 아냐?" 싶지만, 여기서 SK의 고도의 계산이 시작됩니다.
케어형이 싼 게 아닌 이유
원래 셋톱박스 임대료에는 숨겨진 공식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60개월(5년)을 채워 쓰면 그 뒤로는 임대료가 0원"이 된다는 점이죠. 한마디로 장기 고객에게 주는 혜택입니다. 하지만 케어형은 이 규칙을 파괴했습니다. 즉, 10년을 써도 매달 5,500원씩 계속 내야 합니다. 장기 사용자의 메리트를 아예 없애버린 거죠.
대신 파손 보험 혜택을 준다는데, 셋톱박스는 TV 뒤에 가만히 붙어있는 장비라 고장 날 일이 거의 없습니다. 설령 자연적으로 고장 나면 어차피 통신사가 원래 무상으로 고쳐주고요. ^^;
결국 케어형은 확정적으로 받을 수 있는 혜택(임대료 면제)은 빼버리고, 확률적으로 거의 쓰지 않을 혜택(파손 보험)을 집어넣은 구조입니다. 이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네요.
싸진 게 아니라, 계산을 어렵게 만들어 착시 현상을 일으켰다.
스펙과 요금
표를 보면 스마트3에 비해 AI 5 스펙이 좋아진 건 사실이지만, 조금만 깊게 들어가면 세 가지 함정이 보입니다.
- 애플TV라는 거대한 벽: 아이폰 칩을 탑재하고 돌비 애트모스까지 지원하는 애플TV 4K가 임대료 6,600원입니다. AI 5보다 1,100원이나 저렴하죠. 성능 때문에 AI 5를 고른다는 건 논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 스펙보다 중요한 건 최적화: 7년 전 모델인 스마트3도 셋톱박스 본연의 기능은 여전히 쌩쌩합니다. 아무리 좋은 엔진을 달아도 소프트웨어가 무거우면 버벅거리기 마련인데, AI 5는 아직 하드웨어 성능을 다 못 쓰는 느낌입니다.
- 셋톱박스는 게임기가 아닙니다: 셋톱박스로 고사양 게임을 할 게 아니라면, 일정 수준 이상의 스펙은 자기만족에 가깝습니다. 쓰지도 않을 고스펙을 위해 매달 3,300원을 더 내는 건 아까운 일이죠.
외관 둘러보기
디자인은 좋습니다! 그리고 정말 작습니다.
통신 3사의 현행 메이저 셋톱박스들입니다.
좌측은 LG유플러스의 UHD4.
우측은 KT의 기가지니A.
중간이 바로 AI 5입니다.
LED 밝기 조절 기능도 있습니다.
밤에 눈뽕(?) 당하는 일은 줄어들겠군요. 😎
SK도 디자인은 꽤 신경 씁니다.
KT가 영국 시모워파월(Seymourpowell)의 디자인 컨설팅을 통해 제품 정체성을 규정했다면, SK는 산업 디자인 전문 회사인 BEBOP과 협업하고 있지요.
좌측은 기존 SA02 모델, 우측은 AI 5에 제공되는 SA02 개선판입니다.
다양한 OTT 바로가기 버튼이 추가되었는데, 디자인은 어찌 퇴화한 거 같습니다.
리모콘은 USB-C로 충천됩니다. SK가 일회용 배터리 퇴출에는 누구보다 진심이더군요.
USB-PD 충전도 지원합니다.
SK의 현행 4종 셋톱박스입니다.
구관이 명관인 스마트3. 외국물 잔뜩먹은 애플TV 4K 3세대. 별 쓸모없는 카메라 달린 AI4 Vision. 이번에 리뷰하는 AI5까지.
발열 상태는 준수합니다.
요즘 SoC(칩셋)들은 저전력에 진심인 듯 합니다.
총평
주요 장점
- 높아진 스펙
- 작고 콤팩트한 디자인과 세심한 LED 조절 기능
- USB-C 충전 방식의 친환경적 리모컨
주요 단점
- 스펙 대비 비싼 요금
- 와닿지 않는 AI 기능
- 비싼 임대료 + 복잡한 요금 구조
제가 백메가에 입사한 게 2014년이니, 이제는 어느 정도 "회사 일"이라는 걸 경험했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 ㅎㅎ
회사의 일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는 듯합니다.
- 설득력이 있는 일
- 설득력이 없어도 해야 하는 일
이번 AI 5 셋톱박스의 탄생에도 수많은 이들의 피와 땀이 들어갔을 겁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 그 노력이 소비자에게 설득력이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LG유플러스는 다양한 부가기능을 탑재하고도 단돈 4,400원의 셋톱박스를. KT는 아예 3,300원짜리 서민형 모델로 고객의 지갑 사정을 살피는 듯 합니다. 반면 SK의 AI 5는 소비자에게 7,700원을 내고 단순하게 쓰거나, 5,500원을 내고 복잡한 조건을 감수하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 만한 가치를 제공한다고 볼 수 있을까요? 안타깝지만 저는 회의적입니다. 7년 전 출시된 스마트3를 대체할 만큼의 혁신이 보이지 않았거든요.
간만에 실망이 커서 다소 냉정한 평가가 되었지만, 최대한 객관적 평가를 내리고 싶었던 제 마음을 귀엽게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